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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도의 `논어와 음악`-세상을 밝히는 따뜻한 울림 제20곡 - 스승과 제자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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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배계급이 독점하던 ‘시’와 ‘예’
- 모두에 차별없이 가르쳤던 공자

- 자식에게도 같은 잣대 내민 원칙
- 함께 성장한 ‘교학상장’의 실현
- 그의 교육 정신에서 배움 얻어야

‘논어’(論語) 교육이 인성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논문을 부산대학교 한문학·한의학 융합연구팀이 2017년 내놓았습니다. 이 논문 가운데 낮은 수준의 ‘교양한문’ 수강생보다 논어 내용을 이해하는 높은 수준의 ‘논어강독’ 수강생에게서 더 유의미한 인성 증진 효과가 있었다는 대목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코로나19는 공자 탄신일 기념식 모습도 바꿨다. 올해 성균관 대성전 기념식에선 악무(樂舞)를 생략했다. 사진은 지난해 기념식의 팔일무(八佾舞) 모습. 연합뉴스
사실 이 논문은 논어를 바탕으로 한문 교육, 나아가 인문학 교육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명약이든,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든, 정치인이 참고하는 지침서든 2500년을 이어온 논어의 힘을 재확인한 셈이지요.

논어에 유가의 핵심이 담겼다면, 공자 가르침에 얼마나 접근하느냐는 논어를 읽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그래서 주자의 스승인 정자는 논어를 배우고도 전혀 차이가 없는 사람, 한 두 글귀를 얻어 기뻐하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손이 춤추고 발이 뜀뛸(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만큼 제대로 깨우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늉만 내느냐, 되새김질 하느냐에 따라 공자 말씀의 무게가 달라지겠지요.

세상이 바뀌었으니 변한 건 있습니다. 교육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힘을 보태야 하는 중요한 과제라는 점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많이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의 차이가 더 두드러집니다. 교육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고 난리입니다. 추석 연휴 바로 앞, 지난달 28일은 공자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코로나19는 이날 표정도 바꿔버렸습니다. 성균관 대성전에선 ‘공자 탄생 2571돌 기념식(추기석전)’이 열렸으나 외부 인사를 초청하지 않았고, 악무(樂舞)도 생략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려는 고육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공자에 대한 예에 한 치 부족함이 있었겠습니까. 만세의 스승, 만세사표(萬世師表) 공자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실패한 정치가이지만 성공한 교육가라는 ‘스승 공자’의 면모를 두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안연과 자로, 자공과의 대화에서 표출되는 스승과 제자의 정을 따라가봅니다. 다음 회에 공자의 교육법을 이어가겠습니다.

   
스페인 혼성그룹 모세다데스(Mocedades)의 ‘Eres Tu’(그대 있는 곳까지)(QR코드 또는 인터넷 주소 https://youtu.be/naAC37W42ro)를 들으며 시작하겠습니다.

■공자를 교육가로 추앙하는 이유

논어 16편(계씨) 13장에서 공자께서 제자 3000명을 가르친 기본 원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자인 진항이 공자께서 아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몹시 궁금했나봅니다. 진항이 공자 아들인 백어에게 아버지로부터 특별히 배운 게 없는지 물었고, 백어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와 예를 꼽았습니다. 진항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하나를 물어 세 가지를 얻었으니 하나는 시고, 다른 하나는 예며, 마지막 하나는 자기 아들이라 하여 군자가 특별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구나.”

시와 예라면 진항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을 것입니다. 시는 사리를 통달하는 지혜의 밑천이요, 예는 인간 관계의 준칙이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고, 예를 배우지 못하면 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당시 지배계급이 독점하던 시와 예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가르쳤던 교육 혁명의 선구자였습니다. 바로 유교무류(有敎無類)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아들에게 특별대우를 하지 않고 제자들과 같이 가르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정한 잣대, 공정한 대우, 잡음이 생길 틈이 없지요. 지난해 온나라를 둘로 쪼갰던 ‘아빠 찬스’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자기 아들이라고 특별하게 대하지 않음’(군자지원기자·君子之遠其子)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기 위해 필요한 원칙입니다.

제자를 가르치려면 몸소 익혀야죠. 공자께선 ‘호학’(好學)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옛것을 배워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지표로 삼고, 세 사람만 있으면 그 사이에 내게 배움을 베풀어줄 이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아는 것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지행합일입니다.

■부모 자식처럼, 동료처럼…

공자께서 가르쳐 만들려는 새로운 시대의 인재상은 군자,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스스로를 닦아 세상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권력욕과 아집에 사로잡혀 남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일그러진 입신양명의 욕망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 자식처럼, 때로는 동료처럼 간절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공자의 수제자 안연입니다. ‘스승의 은혜’ 노래 아시죠.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이 가운데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는 안연이 공자를 묘사한 논어 9편(자한) 10장의 앙지미고(仰之彌高)에서 나왔습니다. 인(仁)의 핵심이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전수한 안연이 요절하자 “하늘이 나를 버리셨다”며 통곡하신 공자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자로는 공자의 호위무사였습니다. 대놓고 공자께 대든 유일무이한 제자였던 그에게 공자께선 야단치고 어르면서 입에 떠먹여주듯 가르쳤습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야말로 진정으로 앎이니라”(지지위지지부지위부지시지야·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是知也)는 논어 2편(위정) 17장의 공자 말씀이 그 예입니다.

   
부와 능력을 겸비한 자공은 호련(瑚璉)이란 평을 받고, 절차탁마라는 깨우침을 얻습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풀어내고 이를 통해 성숙해집니다. 사람들이 스승보다 낫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계실 때에는 영광스럽고 돌아가시면 슬퍼한다.”(논어 19편 25장). 자공이 공자의 진정한 제자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자께선 세 제자에게 같은 듯 다른 가르침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냈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실현한 셈입이다. 그런 스승을 모신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는 함석헌 선생의 시구를 곱씹어 봅니다. 마음이 외로울 때 믿어지고, 알뜰한 유혹도 물리치는….

   
박광현이 김건모와 부른 ‘함께’(QR코드 또는 인터넷 주소 https://youtu.be/cJXA1pm2SAk)를 들으며 마치겠습니다.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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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07, 2020 at 05:4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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