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이마르 프란츠 리스트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오페라 <케르베로스 이야기>, <1953>, <그 소녀의 이야기>를 비롯 음악극 <이클립스>, <145년만의 위로>, 영화 <마지막 밥상>, <허수아비들의 땅> 등을 포함 다수의 가곡과 실내악곡을 작곡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이재신의 작곡 발표회는 음악적 이상과 고뇌, 목표 그리고 작가정신을 알 수 있는 방편이자 가곡과 오페라라는 인성 음악 작곡을 위한 그만의 노하우가 압축된 이재신의 예술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올 4월에 개최될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 여파로 미뤄진 작곡가 이재신의 <신작 가곡과 오페라 갈라 콘서트>는 2월에 발행된 그의 저서 '가곡과 오페라 작곡론' 출간기념 작곡 발표회였을 정도로 이재신은 오페라든 가곡이든 언어에 입각한 인성음악에 깊은 연구를 통해 일체화를 표방하고 있다. 음과 말(Ton und Wort), 음악과 시(Musik und Gedicht)는 독립된 세계지만 근원과 흐름은 같다. 상호 협력하고 사랑한다. 같은 물질이지만 발원지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미세하면서도 미묘한 차이와 경지를 파악하는 자야만이 둘을 하나로 결합하여 훌륭한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데 한국어 오페라와 가곡 방면에서 이재신은 그중 한 사람이다. 시인으로부터 받은 시의 정서를 작곡가로서의 자아와 주체에 맞제 독립적인 표현을 표방하며 시는 시답게, 극은 극답게 적재적소에 부합시키려는 시도를 뮤지컬과 오페라에서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싱커페이션과 부점 리듬의 경쾌한 반주에 깃든 희망찬 정경의 '꽃사슴 뛰노는 청와대'(오희정 시), 단2도의 날카로운 불협화 음정이 고음에서 성당의 종소리와 같이 울리는 '명동성당에서'(하옥이 시), 작가 미상의 사설시조답게 풍자적인 코믹 가곡 '개를 여라믄이나 기르되', 잔잔한 아르페지오 반주 위에 깔리는 선율이 일품인 '바람위의 여의도'(박하민 시) 그리고 자신이 직접 가사를 적어 음절과 선율이 자연스럽게 일치된 이날 유일하게 초연된 가곡이었던 '한강'(이재신 시) 모두 특색과 개성 그리고 스타일이 살아있었다.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지 않고 노래, 그 자체의 순리에 충실한 시인으로부터 받은 정서를 작곡가 이재신에 의해 소리로 들리고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였다.
뮤지컬 <145년만의 위로>의 넘버 '내 가슴에 별빛'과 오페라 <1953>의 아리아 '아, 꿈이라면', 그리고 한국 초연된 오페라 <그 소녀의 이야기>에서의 '내가 사람을 죽였어'에서의 공통점은 농후한 서정성과 풍부한 선율성의 합침이었다. 음악극의 방향과 내용을 암시하고 전개하는 기악적이고 극적인 요소를 추구한 반주보다는 성악가들이 맘껏 편하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노력한 성악 친화적인 반주도 독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첫째, 한국어의 특성과 법칙에 입각한 발성과 딕션이다. 무엇보다 이재신은 한국어 특유의 성질, 띄어쓰기와 장단, 음절, 호흡 등을 치열하게 연구하면서 선율을 우선에 두는 게 아닌 언어의 의미 전달에 주목한다. 그건 아마 그의 작곡가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것일 테다. 왜 우리 가곡은 가사 전달이 안될까? 왜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는데 듣는 사람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까?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이재신뿐만 아니라 서구 클래식 음악이 유입된 후 서양 음악 작법을 하는 작곡가들의 공통된 과제였고 이재신은 자기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선에서 해결책을 내놓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발성과 소리 내기에서 오는 언어체계의 부딪힘에서 오는 한계에 봉착한다.
둘째, 이런 대중적인 그리고 시각적인 요소까지 갖춘 훌륭한 작품들이 이런 개인의 작곡 발표회에서나 들을 수 있는 한계와 폐쇄에서 오는 답답함이다. 서양음악이 한국에 유입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한국을 대표하고 창작곡이 없는 게 현실이다. 가곡 분야에서는 그나마 여러 다른 복합적인 원인(교육, 방송, 동호회 활동, 시인과의 연계, 독지가의 지원, 작곡가의 물량공세와 비즈니스 등등)으로 인해 몇몇의 작품은 살아남아 꾸준히 불리고 발전되고 있는데 오페라는 심각하다.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고질적인 병폐는 하나의 작품을 정규 레퍼토리화를 하기 위해서 같이 노력하고 동행해야 할 주체자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만의 아집과 적응된 습성으로 인해 자신들의 애로사항만 주구장창 언급하지 전혀 소통과 협업, 융합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합심하여 오직 나라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서만 바라보고 봉사하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인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이다. 창작곡은 그저 국가지원을 위한 매개에 불과하고 수년에 걸친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쳐 작곡가, 대본가, 성악가, 오페라 단장 등의 협심으로 하나의 히트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창작곡은 태생상 낯설고 생소하다. 거기에 한국어 딕션과 노래 부르기를 학창 시절에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다. 이탈리아로 된 오페라를 잘 부른다고 한국 창작곡도 그 정도의 완성도가 나올 거라는 건 지나친 기대와 낙관이다. 그럼 연주자가 한국 창작곡을 부르고 하게끔 하는 메리트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가뭄에 콩 나는듯한 노래 부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당연히 자신의 기량을 뽐낼 수 있고 잘 알고 편한 학창 시절에 배운 노래를 부르거나 누구나 듣기만 하면 아는 노래를 부를 테다. 그래야지 연주자의 에고가 작품 위에 놓이고 관객들이 좋아하고 환호를 지르고 박수갈채를 부를테니. 적은 노력으로 큰 걸 얻을 수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는데 몇배의 시간과 노력를 들여야 하는 창작곡, 그것도 본인이 내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님 학교에서라도 고용을 위한 가산점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작곡가를 제외한 음악 종사자들은 창작곡에 대한 사명이 희박하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개혁과 선도로 이끌어 가야지 순응은 타협에 불과하다. 서진의 '시간에 기대어', 김효근의 '첫사랑',이원주의 '연'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곡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연주자들에 의해 선택돼 심지어 귀국 독창회에서까지 불리고 있다. 이재신의 작품들, 더 나아가 다른 여타 훌륭한 한국 창작곡들이 위 열거한 작품들에 비해 어떤 차이가 있길래 선호와 노출의 빈도가 다른 것인가!
콰르텟 수가 연주한 <그 소녀의 이야기>는 조금만 수고를 하면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 영상 등, 이재신은 스테이지, 방송 등의 실용성 기능에 충실한 작곡가라는 걸 여실히 증명한다. 작년 미국에서 초연되었지만 정작 한국에서 처음 관객들을 만나게 되는 이재신 본인이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하여 대본은 쓴 <그 소녀의 이야기>에서 앞날에 닥쳐올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불행과 운명도 모르게 밝은 미래와 희망에 부풀어 부르는 아리아 '내 이름의 이영자 '처럼, 그 아리아를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어두웠던 다른 곡들의 분위기를 일순하고 앞으로 더욱 활발하게 펼쳐진 작곡가 이재신의 음악세계를 고대한다. 한번의 감상으로 인한 단발적이고 일회성식의 이벤트로선 안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전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듣고 우는데 그치지 말고 더욱 많이 사람들이 연주하고 같이 울게끔 곡의 전파에 모두 나서야 한다.
June 14, 2020 at 07:2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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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의 음악통신 260] Critique: 이재신의 신작 가곡과 오페라 발표회 - 미디어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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